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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 및 교육 정보

조선시대의 교육

by KEI-C 2022.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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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교육은 그 이념적 바탕을 성리학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교육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의 교육철학을 알아야 합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학교 교육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시대의 교육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조선시대의 교육에 대하여 알아보기 전에 간단하게 성리학의 교육 철학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성리학은 유학의 한 계보입니다. 성리학은 송나라에 성립된 유교의 한 학문으로 주자학, 송학 등으로도 불립니다. 이전까지의 유학이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했다면 성리학은 인간의 바른 행위와 그 행위 속 원리와 근거, 본질까지 깊이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즉 현실적인 면보다는 인간의 본성이나 우주 삼라만상 등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관심이 집중된 유교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조선시대의 학교 교육

조선시대 또한 국왕을 포함한 위정자들은 교육을 통하여 유교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계층 체계를 강화하여 국가의 안위와 왕권 강화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학교 교육을 통하여 상위 계급이 교육받아 성인의 가르침에 가까워지고 이와 동시에 하위 계급의 본보기가 되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였습니다. 즉 위에서 모범을 보이면 아래에서 본받는 시스템을 위하여 위의 일부 사람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시대의 학교 중 관학은 성균관과 사학, 향교가 있었고 사학으로는 서원과 서당이 있었습니다.  

 

성균관

성균관은 조선시대의 최상위 고등교육기관이었습니다. 국가를 가장 대표하는 상징적 교육기관을 국학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의 국학이 바로 이 성균관입니다. 성균관 교육의 기본 목표는 교화였습니다. 과거제도를 통한 관리 양성만을 목표로 하던 고려의 교육과는 조금 다릅니다. 하지만 물론 성균관 또한 과거를 위한 등용문의 역할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성균관의 경우는 과거가 부수적인 역할이고 성리학의 탐구가 더 주목적이었습니다. 성균관은 통일신라의 국학과 고려의 국자감과 비슷하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과 학습을 하는 공간이 양립하는 체제였습니다. 이런 양립체제를 묘학제라고 합니다. 제사를 지내는 시설로는 대성전과 동무, 서무가 있었고 교육 시설로는 명륜당과 동재, 서재가 있었습니다. 성균관의 정원은 고려 국자감의 반의반으로 줄어 200명 정도였습니다. 고려시대 국자감으로 인한 재정난을 생각한다면 합리적인 수의 인원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조선시대 인구수를 생각하면 많은 인원이었습니다. 성균관의 주요 교육내용은 사서오경입니다. 시험으로는 서술형의 제술시험과 구술형의 강경시험이 있었습니다. 과거시험 중 생원ㆍ진사시, 즉 소과에 합격한 사람은 성균관에 재학하여 일정 기간 학습을 받아야 문과인 대과에 응시가 가능하였습니다. 이 의무규정이 원점법입니다. 성균관은 성리학의 도를 연구하면서 임금이 잘못한 일이 있으면 상소로 꾸짖을 정도로 성리학의 학습과 실천을 주로 교육목표로 삼긴 하였으나, 대부분 학생들은 문과 시험을 위한 주요 경력으로 성균관을 다녀야만 했습니다. 

 

사학

사학은 원래 사부학당에서 유래된 명칭입니다. 사부학당은 고려의 5부학당을 계승한 것입니다. 사학은 성균관의 하급 단계 학교였으며 성균관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성균관의 교수가 사학의 교수직을 함께 겸하였으며 성균관에 결원이 생겼을 경우 사학의 수강생이 입학을 하기도 하였기에 성균관과 사학은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향교

조선시대의 향교는 지방학교라는 의미보다 '향교'라는 고유 명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시대 향교의 건물구조는 성균관과 동일하게 제사 시설과 학교 시설로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규모 면에서는 성균관보다 작았습니다. 향교의 교육내용은 유교 경전의 강독과 시나 문장을 짓는 능력 학습에 있었습니다. 특히 지방의 경우 과거시험 응시 자격으로 향교를 다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 세종 이후에는 사학 출신자들에게도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지면서 향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조선 후기에는 향교가 군역을 기피하기 위한 양인들의 피역소로 전락하고 교육 기능은 거의 수행하지 못했고 제사 기관으로서의 구실만 하게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향교의 역사적 의의는 현 단위 까지 확장된 교육 시설의 증가 부분입니다. 고려시시대에 향교가 군 단위까지만 설립된 것에 비하면 기하급수적 성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원

서원은 16세기 이후 제사와 교육을 목적으로 세워진 사학입니다. 조선시대 최초의 서원은 풍기 군수 주세붕에 의해 세워진, 백운동서원입니다. 서원이 사학이긴 하지만 성리학을 중심으로 인간의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관학과 그 뜻이 같아, 국가에서는 장려하는 편이었습니다. 좋은 서원들은 국왕의 현판을 하사받고 국가의 인정을 받은 사액서원으로 지정되기도 하였습니다. 최초의 사액서원은 소수서원입니다. 앞서 말한 주세붕의 백운동서원이 현판을 받으면서 '소수서원'으로 명칭이 바뀐 것입니다. 초기의 서원들은 과거 준비나 성리학 연구, 수양 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서원은 정치적 중립성을 잃게 되었습니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자기 당의 후진양성을 목적으로 서원이 건립되기도 하였습니다. 또 지역 상회의 지배권의 구심점이 되는 시설로 그 성격이 바뀌기도 하였습니다. 나중에 서원은 주민 착취를 일삼는 지경까지 이르러 영조와 대원군 시절에는 서원이 철폐되기도 하였습니다. 

 

서당

서원이나 향교처럼 일정한 틀이나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정치적 성격도 띠지 않는 새로운 교육기관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서당입니다. 조선시대의 서당은 17세기부터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상업의 발달로 비양반층들도 교육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였고, 이에 서당이 설립됩니다. 서당은 개인이 설립한 후 학생들을 모집하기도 하였지만, 양반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교사를 직접 초빙하여 개설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을이 공동으로 교육을 위해 교사를 초빙하여 마을 단위에서 서당이 설립되기도 하였습니다. 서당은 관학과 달리 간편하고 실속 있는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조선시대의 학교들이 대부분 관학이었고 유명무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 기능을 다 못하는 조선시대의 학교들은 조선 왕조의 역사만큼 오랫동안 유지되었습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성균관 등의 관학을 유지함으로써 국가의 성리학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었기에 오랫동안 유교 국가의 자부심으로 존재한 것입니다. 오늘날 입시만을 지향하는 여러 가지 병폐들이 조선의 교육에서도 보였다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폐단을 딛고 실학자들이 새로운 교육을 위한 교육개혁을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실학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조선시대의 교육에 대하여 조선시대의 학교 교육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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